2012년 10월 26일 금요일

친절한 금자씨-고화질


게시자 iljhk

감독 박찬욱
주연 이영애 최민신 권예영
 
금자씨 비긴즈 - 복수3부작은 어떻게 발상되었나

세상 모든 작가가 그렇듯이 나 역시 다음 작품을 결정할 때 제일 먼저 적용하는 기준은 바로 내 최근 작품과의 관계다. 그 영화와 어떻게 연결되는지, 또한 동시에 그 영화와 어떻게 다른지.
연관성의 측면부터 살펴보자. 삼부작을 여는 영화 <복수는 나의 것>은, 한반도의 분단문제를 소재 삼았던 <공동경비구역JSA>에 이어 남한 내 계급문제를 다루어보겠다는 포부에서 기획되었다. 한국인의 의식을 지배하는 가장 큰 두 가지 사회문제를 이렇게 차례로 고찰하고 싶었다. 따라서 믿거나 말거나 이 두 편은 하나의 쌍을 이룬다. 아마도 세상에서 이토록 다르기도 힘든 이 둘은 각자 서로에게 일종의 자매편이다. 안 닮았어도 자매는 자매다.
<올드보이>에서의 선택기준은 두말 할 나위 없이 최민식이었다. 한국 영화 연기의 역사에 영원히 기억될 두 남자 배우 중 하나와 이미 연달아 두 차례나 일해 본 처지에서 내 최대 관심사는 나머지 하나와의 만남일 수밖에 없었다. 아마 어떤 감독이라도 그랬을 거라고 생각하거니와 나는, 원작만화를 채 읽기도 전에 최민식이 캐스팅될 가능성이 있다는 프로듀서 말만 듣고 그 기획을 덥석 물어버렸던 것이다. 이렇게 해서 나는 김지운, 송능한, 강제규에 이어 '한국에서 제일 복 받은 영화감독 클럽'에 가입할 수 있었다. 당대의 위대한 두 배우에게 온전히 바쳐졌다는 점에서, 믿거나 말거나 이 두 편은 각자 서로에게 일종의 자매편이다. 송강호와 최민식, 카인과 아벨처럼 안 닮았어도 형제는 형제다.
<복수는 나의 것>과 <올드보이>, 즐겁게 만들었고 그 중 하나는 흥행도 나쁘지 않았다. 하지만 그러자 본의 아니게 두 개의 복수극을 연거푸 만들어놓은 자신의 모습을 발견하게 되었다. 당연히 그 내면을 들여다본 결과 두 작품에 과잉 공급된 분노와 증오와 폭력이 독이 되어 내 영혼마저 황무지가 되어버렸다는 사실이 관측되었다. 그리하여 분노와 증오와 폭력을 버렸다는 얘기를 하고 싶지만, 그러면 얼마나 좋았겠나, 사실은 좀 더 우아한 분노, 고상한 증오, 섬세한 폭력을 도입해야겠다고 마음먹었다는 얘기다. 마침내 일종의 속죄 행위로서의 복수, 영혼의 구원을 모색하는 인간에 의해 수행되는 복수극을 만들어 보이고 싶었다. <친절한 금자씨>는 그렇게 탄생했다.
다음은, 전편과 달라져야 한다는 당위가 작용한 내력. <공동경비구역JSA>는 총싸움 장면도 있고, 거대한 세트도 필요했고, 인물도 많이 나오고, 구성도 복잡하고, 무엇보다도 약간 감상적인 면을 가진 영화였으므로 <복수는 나의 것>이 그렇게 단순하고 조용하고 건조해졌다는 말부터 시작해야겠지. 미니멀리즘을 지향했던 게 사실이다. 대사도 줄이고 싶어서 아예 두 주인공 중 하나를 벙어리로 정해버렸을 정도다. 그랬더니 또 싫증이 나 <올드보이>가 그 모양이 되었다. '최소의 영화'에서 '최대의 영화'로, 그것은 과잉의 미학을 지향한다. 송강호가 아니라 어디까지나 최민식의 영화이므로, '얼음의 영화'에서 '불꽃의 영화'로.
그러나 아뿔싸, 이내 치명적인 단점이 발견되었다. 여자 문제. 돌이켜보건대 데뷔작 이래 내 영화는 언제나 2남1녀의 인물 구성을 취해왔다. 2남끼리 대립하는 투쟁의 가운데에서 그녀들의 내면은 상대적으로 덜 조명되었다는 사실을 인정하자. 특히 <올드보이>의 여주인공은 끝내 진실로부터 소외된 채 영화에서 퇴장해야 했다. 각본을 고치려고 애써봤지만 헛수고였다. 능력의 한계를 절감했다. 펜을 놓으며 혼자 뇌까렸다. '다음 영화는 여자가 주인공이다!' '여자 주인공이 뭘 하지?' '영화에서 여자 주인공이 할 일은 원래 하나밖에 없어, 남자를 혼내주는 거지' '제대로?' '제대로!' '그 여자는 그 남자를 왜 혼내주려는 거지?' '여자는 괜히 남을 해치지 않아, 상대가 먼저 잘못을 했으니까 그러겠지' '상대가 먼저? 그렇다면 복수?' '그렇지!' '또?' '뭐 어때, 아예 이 참에 3부작이라고 부르면 어떨까?' '그럼 어떤 여배우가 그 무서운 역을?' '으음....글쎄....누가 좋을까?'
<친절한 금자씨>는 이렇게 탄생했던 것이다.


그래도... 그렇기 때문에, 나는 금자씨를 좋아했다 - <친절한 금자씨>를 만들면서

어떤 작가도 본인이 경험한 사실 만을 이야기로 만들지는 않는다. 극 중 인물의 심정적 상태를 공감할 수 있는 간접경험과 상상력이 작가로 하여금 관객과 가슴으로 호흡할 수 있다는 자신감을 갖고 이야기를 이어갈 수 있게 한다. 여성과 남성은 발달된 감성의 성향이나 어떤 사실을 수용할 때 내부에서 체계화시키는 순서와 방식이 태생적으로 다르다. 사실, 여자를 주인공으로 이야기를 만들어보자 마음을 먹었을 때 바로 이 태생적 딜레마(?)에 대한 심리적 부담감이 없었다면 거짓말이다. 따라서 금자씨를 만들어가면서 내가 초점을 맞춘 방향은 '여성의 이야기를 해보자'라기 보다는 '이전과는 다른 복수를 말해보자'에 있었다. 그렇다면 내게 중요한 것은 이전과는 다른 복수심리를 이야기할 수 있는 내 심정적인 간접경험이었고 그 동안 송강호(극 중 이름?), 오대수와 더불어 황폐해진 내 영혼도 이 작업을 통해 위로 받고 싶다는 욕망이 있었다. 그런 바램이 내 마음속에 있어서 그랬을까. 결과적으로 복수극을 치른 우리 금자씨는 영혼의 구원을 얻지는 못했지만 그녀를 위로해 줄 수 있는 희망을 선물 받는다.
복수심은 인간이 가진 가장 인간다운 감정이라고 생각한다. 특히 극중 인물의 본인을 통제할 수 없는 복수심에서 나는 인간에 대한 참을 수 없는 존재의 연민을 갖고 있다. 극복하지 못해 고통스러운 가슴의 상처는 어느 누구에게도 위로 받지 못할 때 결국 곪아 썩은 내를 풍기게 된다. 그리고 급기야 스스로를 위로해줄 수 있는 마지막 희망의 방법으로 복수를 선택한다.
이 넘치도록 많은 인간들 사이에서 완벽하게 소외된 외로운 그들에게 본인을 위한 복수극은 위로가 될 수 없다.
그래서 안타깝다. 모든 복수의 여정을 마친 금자씨에게 또 다시 끝도 희망도 안 보이는 불행한 영혼을 형벌로 안겨 줄 수는 없었다. 왜냐하면, 금자씨는 조금 다른 사람이기 때문이다.
금자씨는 자신에게 해를 가한 자에 대한 분풀이에 앞서 죄없이 죽은 영혼에 대해 '더불어 살아가는 한 인간'으로서 느끼는 죄책감에서 발생된 속죄 받고 싶은 욕망에 의해 복수극을 행한다. 그래서, 그렇기 때문에, 나는 구원받지 못한 금자씨에게 새로운 희망을 선물하고 싶었다. 그리고 이 영화 안에서 사람으로부터 상처받은 사람에게 주어진 희망의 선물은 역시 사람이다.
사람은 사람을 통해 치유되어야 한다.
내가 그간의 복수극을 정리하면서 하고 싶은 말은 이것이었다.
완벽한 사람은 없는데 우리는 자꾸만 인과응보를 바란다.
내가 어떤 것을 지켜왔고 혹은 어떤 것을 지키지 못해 어떠한 대가를 치렀기 때문에 남도 그래야 한다는 생각이 우리를 가두고 있을 때 그것이 스스로의 족쇄가 되어 나도 모르는 누군가의 희생을 뒤따르게 만든다.
우리의 아저씨들, 강호씨 대수씨가 금자씨를 보고 난 뒤 '왜 저 여자한테는 있는데 우리한테는 없었던 거야?'라며 마구 질투하기 시작하여 복수심에 나를 공격한다면 나는 이렇게 말해줘야지.
"세상에 완벽한 사람은 없는 거예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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